클라리스, 한니발 렉터가 없는 스탈링은 짝퉁이다

 

 

 

CBS Drama, Clarice

 

<클라리스>는 미국 CBS에서 2021년 2월부터 6월까지 방영된 양들의 침묵 프리퀄 드라마로 한니발 렉터 박사가 중심인 기존 시리즈와 달리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버팔로 빌 사건 1년 후'를 그리고 있다. 오늘은 드라마 속 연쇄살인보다 더 지독한 극 중 설정과 시나리오 이야기를 해보겠다.

 

*아래는 대량스포를 포함한 포스팅입니다. 안 보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양들의 침묵>의 조디 포스터와 안소니 홉킨스


  한니발 시리즈에서의 클라리스


토마스 해리스의 원작 소설 <한니발>에 묘사된 클라리스는 겉보기엔 야무지고 단단하며 의지가 굳은 FBI 수습요원이지만 과거 트라우마와 자기연민으로 인한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로 인간 심상을 꿰뚫고 조종에 능한 한니발 렉터 박사가 저변에 꽁꽁 숨겨놓았던 클라리스의 심연을 건드리게 되면서 비로소 그녀는 과거 상처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듯 자신을 속일 정도로 인정하고 싶지 않던 상처 가득한 과거와 유약한 내면, 결핍 충족을 위해 무던히 애쓰며 욕망을 남몰래 분출하던 자신의 모습을 들킨 클라리스 M. 스탈링은 본디의 모습을 새로이 눈을 뜨게 한 냉혹한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에게 매료된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끝내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양들의 침묵, 1991] 조디 포스터
[클라리스, 2021] 레베카 브리즈

 

한니발 렉터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상의 캐릭터 중에 가장 우아한 살인마라는 별칭이 붙은 데에는 그의 품위 있는 취향과 지적 우월성, 탁월한 통찰력과 같은 인물의 매력만은 아니다. EGO에 대한 접근과 존재의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렉터 박사는 아버지의 부재를 메워주는 멘토이며 공포와 성적 긴장은 맞닿아있는 감각이기에 이 둘의 극적인 관계성에서 강렬한 이끌림 그 이상의 모먼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혹적인 것이다. 

 

이 두 인물의 위험한 공조는 선과 악의 극명한 대비임과 동시에 대립이 주는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지적이면서도 야성적인 로맨스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한니발 렉터는 하데스이며 클라리스 M. 스탈링은 페르세포네이다. 그리스 신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페르세포네 롤인 클라리스는 지옥의 신을 숭배한다는 점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악명 드높은 연쇄살인마라는 점은 명성과 권위를 나타내고 자신이 끝끝내 쫓아야 되는 수배범이라는 점은 추종을 의미하며 이러한 악마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점은 우월감을 상기한다. 이렇듯 FBI 요원으로서 또 개인 본연으로서 클라리스가 느끼는 양가의 감정이 한니발 시리즈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주제이자 핵심이 된다. 

 

 

 


  한니발 렉터가 없는 클라리스 

클라리스는 애초 투명하고 정의롭기만 한 인물이 아니다. 성공과 명성을 누구보다 바라고 악에 매혹된 추종자로 아름다운 껍데기 속에 음울한 민낯을 감춘다. 

 

양들의 침묵의 심볼인 나방의 번데기가 변태 하는 과정은 변신을 의미하며 '이전과 다른 나'를 상징한다. 원작 소설과 한니발 시리즈에서 아직 애벌레에 불과한 클라리스의 변태(변신) 과정의 트리거는 한니발 렉터였다. 그러나 드라마 <클라리스>에서는 한니발 렉터의 그림자를 지우고 자신이 주체가 된다. 

버팔로 빌 사건의 피해자로 클라리스는 PTSD에 시달리고 자가발전한 기억의 혼돈 속에서 렉터의 영향력이 아닌 이름 모를 전문상담가들의 도움을 전전하다 심연에 진입하게 되고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스토리로 한니발 렉터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도려낸다. 어처구니없게도 세계관을 파괴하는 진행인 것이다.

 

 

 

 

한니발의 존재를 지울거면 굳이 양들의 침묵 프리퀄이었어야 했나? 의문이 드는 지점인데 나방의 이미지를 제외하면 여성을 감금해 살가죽을 벗기는 플레인필드의 도살자 에드워드 게인을 모티브로 한 유사 버팔로 빌 캐릭터는 범죄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PTSD에 시달리는 FBI 요원'이라는 설정 역시도 대중매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로 <크리미널 마인드>에서는 15년째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크마에서는 PTSD로 인한 은퇴 과정과 송별회도 보여주는 마당에 더는 새로울 것이 없다. 웃긴 건 FBI 최고 권력자 루스 마틴 역의 배우 제인 앳킨슨은 <크리미널 마인드>와 <24>에서도 동일한 포지션, 동일 캐릭터라는 점,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도 비슷한 역할로 쓰인다.

 

 

 

여성 주지사, 여성 국장 전문배우 제인 앳킨슨(Jayne Atkinson)


태초 클라리스는 다각적인 시선과 타고난 영민함, 번뇌에 사로잡힌 음울한 캐릭터인지라 도식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범죄물의 레전드이자 여성 요원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굳어진 탓에 유사 클라리스는 훗날 수많은 작품에서 차용된다. 보그 컷 단발머리와 청순한 외모의 백인 여성, 화이트 트래시 슬하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촌년, 불굴의 의지로 민폐를 끼치는 조직 내 빌런, 뛰어난 육감 따위가 그러하다. 


한니발 렉터와 같은 사이코패스 범죄자에게 매혹된 요원이라는 설정 역시도 21세기에는 도식이 되어버렸는데 <킬링 이브>같은 영국 드라마에서도 GL의 형태로 풀어낸다. 불쾌하고 징그러운 아저씨 대신에 싱그럽고 스타일리시한 젊은 여성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양들의 침묵, 1991] 클라리스 스탈링과 단역 흑인여성
[클라리스, 2021] 클라리스 스탈링과 이름이 생긴 주조연 흑인여성


  지나친 피씨주의의 폐해

(후려쳐서) 절대악인 늙은 남자가 사회초년생인 어린 여자를 가스라이팅 한다는 설정이 전 세계적인 플로우인 '걸스 캔 두 애니띵' 추세에 벗어난다는 것을 염두한 각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럼 새롭거나 개혁적이라도 하던가. 

 

이 드라마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의적 주석 뿐만 아니라 체감상 흑인의 인권신장 이야기로도 절반을 할애한다. 스파이크 리 감독작인 줄? 해골이 2만 개다. 달라진 세상에 발맞추려는 의도라기보다 강박을 넘어서 광기에 가깝다. 연쇄살인범보다 인종 집착과 일침이 더 무서움.

 

 

 

닉 샌다우(머레이), 루카 드 올리베이라(토마스), 칼 펜(샨) 다양한 인종구성
수사팀 반장, 마이클 커들리츠(폴 크렌들러)


배경이 90년대 초반임에도 인도계(샨, 칼 펜), 이탈리아계(토마스, 루카 드 올리베이라) 이민자 집안의 미국인이 수사팀 다섯명 중에 2명인데 능력이 뛰어난 여성 요원 아르델리아(데빈 A. 테일러)와 인권 시위를 부추기는 그랜트 요원(K.C. 콜린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배제된다는 설정 또한 촌극에 가깝다.

 

좋게 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으나 편협하고 지나친 피씨주의가 재미를 반감하고 인권웅앵을 차치하고 평범한 시즌제 수사물이라고 쳐도 드럽게 재미없는 쪽에 속한다. 긴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엉성한 각본과 연출 문제도 있지만 주객이 전도된 느낌 때문이다.

 

 

 


  한니발 렉터가 없는 스탈링은 짝퉁이다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버팔로 빌 사건 1년 후 생존자인 캐서린이 그의 모친을 찾아가는 스토리는 유일하게 흥미를 끄는데 캐서린 마틴을 연기한 마니 카펜터의 감정선은 훌륭하다. 하지만 이 마저도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는 생략된 제임 검(버팔로 빌)의 과거 행적에 관련한 내용을 모친이 대사로 줄줄 읊으며 산통을 깨버린다. 

영리하지도 매력적이지도 못한 이 수사물은 기억에서 리셋하고 싶을 지경인데 예산 문제로 도중에 접힌 매즈 미켈슨 주연의 드라마 <한니발>이 얼마나 선녀같은 작품이었는지 추팔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드라마판 <한니발>에서도 클라리스 스탈링 캐릭터 판권이 넘어오기 전에 드라마가 캔슬 당해서 스탈링의 존재는 완벽히 지워졌는데 이 드라마에서도 한니발 렉터 판권이 넘어오지 않아서 이런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밋밋한 드라마가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 한니발 없는 사회초년생 촌뜨기 클라리스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니 20대 열혈민폐녀로 캐릭터가 납작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양들의 침묵, 1991] 조디 포스터
[클라리스, 2021] 레베카 브리즈

 

왓챠 익스클루시브는 갓띵작 달고 추천하지만 이런 작품은 재앙에 가깝다. 원작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없는 썩은 각본과 허술한 연출로 덕후가 메모장에 쓴 팬픽보다도 수준 떨어진다. 이런 드라마는 제발 HBO에서만 손대길. 뻐킹 CBS! 배우가 아깝다.

 

외모만 그럴듯하게 조디 포스터와 줄리안 무어를 섞어 놓은 듯한 짝퉁 스탈링 레베카 브리즈처럼 한니발 렉터가 없는 스탈링은 짝퉁이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